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샐리 라이드 (문단 편집) == NASA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 == [[파일:CIn5C15.jpg|width=580]] [[아폴로 계획]]이 폐지되며 NASA의 우주비행사 선발 계획은 중단되었다. 그 후 [[우주왕복선]]의 개발과 운용을 위해 35명이 선발된 1978년 [[NASA 우주인단]] 8기 그룹에서 여성은 6명이었다. 사진의 좌측부터 섀넌 루시드[* 1990년대에는 [[미르]]-[[우주왕복선]] 합작 미션에서 활동했다. 미르 엑스퍼디션의 역대 유이한 여성(다른 한 명은 러시아의 옐레나 콘다코바)으로, 우주 [[명예 훈장]]을 받았다.], 마거렛 레아 세든, 캐스린 설리번[* NASA 여성 우주비행사 중 최초로 [[EVA]]를 수행했다. 2014년부터 [[연방해양대기청]]장으로 재직 중.], 주디스 레스닉[* [[STS-51-L]] 미션의 희생자. ], 애나 피셔, 샐리 라이드. 이들 중 NASA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라는 영예는 라이드에게 돌아가게 된다. 초기에 인터뷰를 하면서 여성 비하적인 어조의 질문공세를 받아내느라 스트레스가 많았다. 심지어는 동료들도 여자를 대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던 [[꼴마초]]들이 많았는데, 동기 우주비행사 [[마이크 멀레인]][* 12년 간 [[가톨릭]] [[미션스쿨]]에서 구시대적인 교육을 받고 [[미국육군사관학교]]를 나왔던 군인 출신이다. (경우는 좀 다르지만)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[[남중]]-[[남고]]-[[공대]]-[[군대]]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.]은 베스트셀러 회고록 에서 자신이 샐리 라이드가 듣는 자리에서 남자들끼리 얘기하듯이 젖통이란 말을 썼다가 10년 간 서로간에 1마디도 나누지 못했다고 토로했다.[* 다만 마이크 멀레인의 이 회고록은 라이드의 사후에 샐리 라이드를 [[아웃팅]]한 게 아니냐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. 여자(그것도 겁나 이쁜 여신들!), [[유대인]](자기가 친하게 지낸 주디스 레스닉), [[엘리슨 오니즈카|동양인]], 박사 후 연구원 하던 민간인(스티브 홀리), [[흑인]], [[가톨릭]](멀레인 본인), [[원리주의]] [[기독교인]], [[무신론자]] 등 너무나도 다양한 배경과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쏟아져 들어와서 [[외계인]] [[정기모임|정모]]라도 연 것 같았다는 얘기인데, 그 과정에서 "와 씨바 얘네들 중 [[동성애자]]도 있을듯 ㄷㄷ해" 식으로 넘어갔던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. 멀레인은 훗날 철 들고 나서야 그 시절에 대해 후회하며 라이드와 동기 여성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고 토로.]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470px-Sts-7-crew.jpg]] 1983년 STS-7 챌린저 미션의 승무원들. 가운데의 [[로버트 크리펜]]은 [[존 영]]과 함께 최초의 우주왕복선 미션인 STS-1을 수행한 파일럿이었지만 나머지는 전부 첫 비행이었다. 또한 STS-7은 우주왕복선의 최초의 5인 미션이기도 했다.[* [[우주왕복선]]은 최대 탑승 인원 수가 7인이었지만 그것은 그저 이론상 '최대'일 뿐, 우주정거장 장기체류 프로그램의 교대인원 셔틀 역할도 해야 하고 1명 태울 때마다 발생하는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았던지라 5~6인 선에 그치는 경우도 많았다.] 통신 위성과 관계된 임무에서 로봇 팔을 정상적으로 조작하고 위성을 성공적으로 회수했다. [[NASA]]의 [[공돌이]]들은 1주일간 넉넉하게 쓰라고 [[탐폰]] 100개를 싸줬다는 얘기가 있다.[* 이 시절 NASA는 우주에서 [[월경]]이 일어날 경우 몸에 일어날 변화에 대해 초보적인 수준의 연구에 그치고 있었다. 오늘날에는 소행성 탐사, 화성 탐사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적절하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지만.]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470px-STS-41-G_crew.jpg]] 1984년 챌린저호 STS-41-G 승무원들. 마찬가지로 크리펜과 함께 참여한 이 미션은 캐스린 설리번도 함께하며 최초로 여성이 2명 참여한 미션으로 기록되었고, 설리번은 이 미션에서 NASA 여성 우주비행사로서는 최초로 [[EVA]]를 실시했다. 하지만 1986년 초의 [[STS-51-L]] 챌린저호 폭발사고로 그 해 7월의 STS-61-M 미션 승무원으로 예정되었던 샐리 라이드는 대신 로저스 위원회의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NASA 본부에서 활약하게 된다. 이 당시 멤버들이 굉장히 쟁쟁한 인물들인데, [[리처드 파인만]], [[척 예거]], [[닐 암스트롱]]이 있었다. 이 당시 발사 전날에 발사 취소해야 한다고 우겨댔던 부스터 담당 엔지니어 로저 보이숄리(Roger Boisjoly)의 제보로 초기에 원인 파악을 했지만 NASA 내부의 정치적인 알력이나 [[내부고발]]로 인해 자신과 NASA의 동료들이 입을 엄청난 대미지를 생각하여 친분이 있던 [[도널드 쿠티나]] 공군소장[* 이후 [[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|NORAD]] 겸 우주사령관까지 지내며 대장으로 예편.]에게만 진실을 털어놓고 쿠티나 장군이 머리를 써가며 파인만을 진실로 다가가게끔 유도한다. 파인만이 챌린저호 사고의 주 원인이었던 O링 실험을 즉석에서 해내며 원인 규명을 마무리한 것이 유명하지만, NASA의 실무자들은 심증부터 이것이 원인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누구라도 실토하면 그 사람은 사실상 [[숙청]]될 것이라 걱정했다고 한다. 이 때 라이드가 원인 규명에 있어 큰 공헌을 했음은 사후에 밝혀진다. 그렇게 샐리 라이드는 1987년 NASA를 나와 스탠포드의 안보 연구소로 옮긴다. 이후 1989년 모교를 떠나 [[캘리포니아 대학교]] 샌디에이고 캠퍼스(UCSD)의 [[물리학]] 교수가 되었고,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주 프로그램 홍보에 나섰다. NASA [[제트추진연구소]](Jet Propulsion Laboratory)와 UCSD의 주도로 이뤄진 ISS EarthKAM에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[* 학생들이 참여하는 부분은 우주선에 탑재하는 카메라 제작.]했고 2010년대의 달 중력장 연구 프로젝트인 GRAIL에 있어서도 [[초등학생]]들이 탐사선의 이름을 짓고 [[중학생]]들이 만든 [[카메라]]를 탑재하는 등 대중 홍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. 또한 과학교육 재단 샐리 라이드 사이언스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의 과학에 대한 친근감을 키우고 과학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. 2003년 [[STS-107]] 컬럼비아호 폭발사건이 터지자 다시 조사위원회에 참가했는데, 챌린저와 컬럼비아 두 사고의 조사위원회에 모두 참여한 인물은 샐리 라이드가 유일하다. 2008년에는 [[버락 후세인 오바마]]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성명을 냈고, 오바마 행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부문에 차기 유인 우주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. 그렇게 대중 강연도 많이 다니고 연구와 홍보를 활발히 하던 샐리 라이드였지만, 말년에 [[췌장암]] 판정을 받았다. 19개월간 투병을 이어갔지만 췌장암 자체가 원체 사망율이 높은 암이라. 2012년 7월 23일 세상을 떠났다.[* 1달 후 [[닐 암스트롱]]이 세상을 떠났다. NASA는 이로 인해 2012년 여름 내내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.]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있었지만 화장하여 고향의 아버지 곁에 묻혔다. NASA에서는 2012년 12월 임무를 마친 GRAIL 달 탐사선 Epp과 Flow를 달 표면의 골드슈미트 크레이터 주변 산에 충돌시킨 NASA는 충돌 지점을 샐리 라이드라 명명한다고 발표했다. [[미합중국 해군]]에서는 [[닐 암스트롱]]급 해양조사선 시리즈의 2번함에 샐리 라이드의 이름을 붙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